목차
INTRO |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 퇴근 후 관성처럼 마시는 맥주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주말마다 편의점에서 세계 맥주를 꽤 고민 끝에 골라 담지만, 정작 마실 때는 시원하기만 하면 아무거나 상관없어진다. 맥주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퍼멘티드 고스트>를 방문한 것도 '간단히 맥주나 한 잔'하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파는 건 '간단한 맥주'가 아니었다. 이름도 생소한 '비어 소믈리에'가 엄선한 각종 맥주를 마셔볼 수 있는 '비어 테이스팅 바(Beer tasting bar)'였다. 첫 잔을 마시자마자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 드디어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공간도 아주 훌륭하니 성수 분위기 술집을 찾는다면 딱이다.
1. '비어 소믈리에'란?
매장 가운데에 커다랗게 놓인 동그란 바테이블. 가운데에는 자신을 '비어 소믈리에'라고 소개하는 사장님이 서계신다. 벽에는 자격증 여러 개가 걸려있다. 2016년과 2019년, 독일에서 일하는 한국인 비어 소믈리에가 한국에 나와있을 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원산지에 따라 맥주의 맛이 어떻게 다른지부터 각 양조장은 어떤 방식으로 맥주를 발효하는지, 또 맥주를 담은 병에는 양조장의 어떤 철학이 담겨있는지까지 세세하게 설명해준다. 맥주를 홀짝이며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시간이 훌쩍 갔다.
사장님은 원래 IT회사에서 사업개발을 했다고 한다. 워낙 맥주를 좋아해서 사이드잡으로 하다가 작년에 가게를 내고 본업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좋은 맥주를 많이 알리고 싶어서 시작했다고 말하는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좋아하는 맥주를 사모으고, 파는 곳이 없을 땐 직구까지 해서 들인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는 사장님이 열심히 모은 전세계 맥주를 서울 한복판에서 편하게 즐겨볼 수 있었다. 우리가 마신 건 총 9종류. 프라이빗 코스로 나오는 4종류를 마신 뒤 너무 맛있어서 계속 한 병씩 더 추가했다. 울고있는 지갑과 다음날 숙취는 그 부산물.
2. 맥주에서 이런 맛이?
제품명 오드 크릭 분(Oude Kriek Boon)
도수 6.5%
원산지 벨기에
제조일 2020년 8월 25일
품질유지기한 2040년 8월 24일
프라이빗 코스 4종류 중 첫 번째 맥주였다. 이미 식사를 거하게(=양대창) 하고 왔다고 했더니 입을 씻는 느낌으로 준비해 준다고 했다. 람빅이라는 자연발효 맥주로, 산미가 특징이다. 병에 적힌 취급방법을 보면 눕혀서 보관하지 말고, 와인잔 같은 글라스를 이용해 마시라고 되어있다. 세워서 보관하는 이유는 바닥에 가라앉은 효모가 맥주를 따를 때 다 쏟아져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근데 좀 이상했다. 맥주를 왜 보관하지? 맥주란 모름지기 따면 그 자리에서 다 마시는 거 아닌가? 아니다, 이 맥주를 포함해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맥주는 와인처럼 코르크로 밀봉돼있으며 한잔을 마신 뒤 보관했다가 다시 마시기도 한다. 병 안에 효모들이 발효하면서 톡톡거리는 탄산을 유지시켜 준다고.
그렇다면 맛은? 한입 마시자마자 정말로 신세계가 열렸다. 맥주에서 이런 맛이 난다고? 지금까지 내가 마셔온 것들은 다 뭐지? 정말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맛이었다. 와인도 위스키도 전통주도 아닌 전혀 새로운 맛이다. 체리맛이 강하게 느껴지고 체리 안에 있는 씨 때문에 너티함도 느껴지며, 새콤한 산미와 약간의 짭짤함도 있다. 이때부터 우리 부부의 텐션은 극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 지금 새 세상을 알게 된 것 같아!
3. 색다른 치즈와의 페어링
맥주마다 어울리는 치즈가 서빙된다. 하, 치즈 너마저. 맥주도 완벽했는데 치즈까지 완벽하면 반칙이잖아. 멜론망고치즈가 최고의 사치라고 생각했던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 사장님이 얼마나 맥주에 진심이신 분인지 치즈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치즈도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어렵게 들여오신다고. 특히 오른쪽에 '떼트드무안(Tete de moine)'이란 치즈는 내 맘에 쏙 들었다.
떼트 드 무안은 스위스어로 '수도승의 민머리'라는 뜻. 라벨에도 민머리 수도승 세 명이 그려져 있다. 커다란 원형 치즈를 전용 커팅칼로 얇게 깎는 게 특징인데, 그 커다란 원형이 수도승의 민머리와 비슷하다고 지어진 이름이란다. 맛은 짭짤한 노가리 맛이 난다. 치즈에서 생선맛이 난다니. 비위가 약한 남편은 별로라고 했지만, 노가리는 좋아하는데 질겨서 싫어하는 나로서는 완벽한 안주를 발견한 셈이었다. 집에 하나 사두고 싶은데, 수도승의 민머리가 너무 커서 고민 중이다..
4. 밀맥주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닐까?
남편은 밀맥주를 싫어한다. 밀맥주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싫다고 한다. 그런데 사장님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사실은 밀맥주를 싫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밀맥주(블랑, 곰표 등)에서 나는 향은 정통 밀맥주의 향이 아니라 인공향료 냄새라는 것이었다. 사장님이 우리에게 소개해준 밀맥주는 스트라페 헨드릭. 6대째 양조장을 하고 있는 헨드릭 집안에서 만든 맥주다.
제품명 스트라페 헨드릭(Straffe Hendrik)
도수 9%
원산지 벨기에
두꺼운 거품이 생기는 게 특징이다. 퍼펙트휩 폼클렌징처럼 쫀쫀하고 부드러운 거품이 한가득 생긴다. 살짝 가라앉은 뒤 한번 더 따라서 서빙된다. 거품이 정말 부드럽고 거품 끝에 느껴지는 밀맥주 향은 정말 향긋했다. 과실향이 아주 좋다. 밀맥주를 싫어한다던 남편, "나 밀맥주 좋아하는 거 같아!"
5. 맥주 경험을 팝니다.
이곳은 맥주를 파는 곳이 아니다. 맥주를 다양하게 즐겨보는 '경험'을 파는 곳이다. 너무 만족스러워서 다음에 친구 데리고 또 오자고 하던 차에 기프트카드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경험을 선물해 보세요'. 무릎을 탁 쳤다. 오늘 나는 이곳에서 맥주값이 아니라 맥주 경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거구나. '가볍게 맥주나 한잔 하러 가자'던 우리는 이곳에서 무려 23만 원을 썼다. 결제하고 든 생각은 '내가 비싼 맥주를 마셨구나'가 아니라 '내가 그동안 싼 맥주만 마셔왔구나'였다. 난 조만간 한번 더 방문할 것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성수 술집, 성수 맥주집 찾는다면 퍼멘티드 고스트를 강력 추천한다.